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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설임의 윤리학.(3)그외 2024. 8. 6. 17:25
1.
‘타자’. 그것은 원리적으로 우리의 통제와 지배가 미치지 않는 우리의 이해와 공감이 되지 않는 자를 가리킨다. ‘타자’는 이름 붙일 수 없고 분류하지 못하고 우리의 지적 사정의 한계로서 우리 눈앞에 압도적인 구체성을 동반하고 나타난다. ‘타자’에 대해서 우리는 ‘중립적’ 혹은 ‘학술적’인 시선으로 맞이할 수 없다. ‘중립적’이거나 ‘학술적’이기 위해서는 ‘나’와 ‘타자’를 동시에 포섭하는 패러다임의 존재가 전제가 되기 때문이다.‘중립적’이지 않다는 것은 말을 바꾸면 처음부터 ‘나’는 타자에 대해서 당파적이라는 것이다. ‘나’가 타자에 향하는 시선은 그때그때마다 내가 분비하는 ‘정동성情動性’을 띠고 있고 그때그때마다 이미 ‘나’의 예단에 의해서 왜곡되어 있다.
타자는 늘 ‘상위자’이든지 혹은 ‘하위자’여서 결코 우리와 동일 수준에 서지 않는다. 타자와 우리는 등격의 존재가 아니다. 타자와 나 사이의 이러한 비등격성, 비대칭성을 레비나스는 ‘얼굴’이라는 독자적인 술어로 설명했다. ‘인식’은 그 대상을 나의 것으로서 파지한다. 인식은 대상을 소유한다.
2.
레비나스는 용의주도하게도 ‘심문이 이루어지고 있다’라고 할 때에 ‘se faire’라는 ‘대명동사’를 이용해서 심문에는 주체가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것을 간과한 것이다. ‘타자성의 철학자들’은 ‘타자에 의한 자아의 심문’을 이런 식으로 해석했다. ‘타자’에 대한 윤리적인 책무와 죄책감을 느낄 수 있는 자아가 있다. 이것은 ‘윤리적 주체’이다. 한편으로 타자를 단순한 이해 지배 소유의 대상으로 간주하고 윤리적 유책성을 받아들일 수 없는 자아가 있다. 전자는 ‘좋은 자아’이고 후자는 ‘나쁜 자아’이다. 윤리적으로 ‘좋은 자아’는 자기 성찰적이고 지적으로 성실하고 사상적으로 전위적이다. 반면에 자기중심적인 ‘나쁜 자아’는 무반성적이고 지적으로 불성실하고 사상적으로 반동적이다.
‘자기 심문’은 단순한 유책성의 고백과 무능성의 인지라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그렇게 해서 엄격하게 스스로의 윤리적 유책성을 고발하고 스스로의 지적 빈곤을 인식할 수 있을 정도로 윤리적으로 성실하고 지적으로 탁월하다’는 ‘한 번 비튼’ 자기 긍정을 논리적으로 귀결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 위신을 ‘자기 심문이라는 고역’에 대한 지적 보상이라고 이해했다. ‘타자’의 현전에 굴복하고 ‘타자’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예의를 갖춘 자는 그 대가로서 ‘동료들’을 위압하는 카드를 손에 넣는다. 이러한 사상적 곡예는 확실히 평범한 사람이 착상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내 안에 있는 억압자를 심문하는’ 것을 논쟁적 무기로서 최대한 공리적으로 활용한 것은 내가 아는 한 사르트르이다. 1952년에 그는 이 전술을 갖고 카뮈에 대한 사상전에서 완승을 거두었다. 사르트르가 논쟁가로서의 본능으로부터 고른 이 전술은 그 후 포스트모던기의 ‘정치적으로 옳은’ 운동 안에서 크게 활용되게 되었다.
“나는 차별자다. 나는 억압자다. 나는 다수파다. 나는 정상인이다. 나는 강자다” 이 선언은 곧바로 ‘면죄부’로서 기능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개전된 자기중심자’라는 특권적 입장으로부터 개전을 망설이는 모든 동류에 대해서 가열한 심문을 할 권리를 그들은 손에 넣는다.
현재가 두드러지게 ‘동질성 지향’의 시대라고 한다면 그것은 이렇게 해서 정식화된 ‘타자의 논리’에 우리 시대가 진절머리를 내기 시작한 것의 징후이다. 현재 ‘타자’라는 말을 누군가가 입에 담을 때 그것은 반드시 ‘심문’이라는 행위와 세트가 되었다. ‘타자’라는 말을 입에 담을 때 그들은 반드시 누군가를 날카롭게 따져 묻고 들볶고 단죄하기 위해서 그 말을 이용하고 있다. ‘타자’ 문제라는 것은 본래 ‘타자와 나 사이에는 어떠한 ‘사랑’의 관계가 성립할 수 있는가?’와 같은 아주 개인적인 물음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사랑’에 관해서 철학의 어법으로 철저하게 말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지금 사람들은 일제히 이렇게 주장하기 시작했다. “나는 나다. 나는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을 말하고, 하고 싶은 것을 한다. 나는 나와 공감할 수 있는 사람하고만 말을 교환한다. 내가 ‘나라는’ 것에 나는 어떠한 죄책감도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는다.” 현재 세계적 규모로 진행되고 있는 배외주의적인 내셔널리스트들과 원리주의자들의 프로파간다는 ‘나는 나이고 타자는 타자이다. 그 사이에 다리를 놓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오래되고 새로운 명제에 수렴된다.
그러나 자신의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처음부터 과도하게 낮게 설정하는 것은 자신의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과대평가하는 것과 똑같이 유해하다. 커뮤니케이션이 불가능한 상대와 이런 저런 궁리를 다해서 커뮤니케이션을 시도하는 ‘나’의 시스템의 삐걱거림으로부터 ‘사랑’은 기동하는 것이 아닌가? 타자와의 만남의 의미는 ‘나의 이해를 넘어서고 나의 공감을 거부하는 자’를 ‘외부’에 구상하는 관상觀想적인 행위로는 달성되지 않고 그러한 ‘외부’를 향해서 어떠한 보증자도 준거 틀도 없는 채로 그럼에도 몸을 던지는 ‘나’의 탐험적 실천 속에서 구축되어야 할 것이 아닌가?
3.
어떠한 전대미문의 모험도 그것이 언젠가는 ‘고향의 섬’에 돌아왔을 때 사람들에게 들려주기 위한 모험담으로서 ‘모험에 관한 이야기’로서 기존의 화법에 기초해서 경험되는 한 그 모험은 ‘월경越境’이라고 불리지 않는다. 그것은 ‘순력巡歷’이다.
‘순력자’는 경험을 쌓음으로써 견문을 늘리고 교양을 깊게 하고 심신의 능력을 높이고 재화를 갖고 고향의 섬에 돌아온다. 그러나 ‘월경자’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 발걸음은 자신의 기원 그 자체로부터의 일탈로서 살게 된다. “너는 너의 고향, 너의 아버지의 집을 나와서 내가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창세기)라는 ‘신’의 명령에 아브라함이 따른 것처럼. ‘월경’이라는 것은 아브라함이 한 것처럼 ‘절대적 타자로부터 도래하는 말’에 따라서 ‘집과 고향’을 버리는 것이다. 아마도 철학적 주제로서의 ‘월경’은 ‘사랑’의 문제로, 말을 바꾸면 커뮤니케이션의 문제로 집약된다.
‘단독자’라는 것은 “나의 판단의 ‘옳음’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자가 한 명도 없는 국면에서도 ‘옳다’고 믿는 행동을 실천하는” 자를 가리킨다.
여기서 물음의 대상으로 부각한 것은 해석의 ‘옳음’이 아니라 ‘무엇이 옳은지를 결정할 심급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그럼에도 결단할 수 있는 자’가 출현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책임하에서’ 타자의 말을 해석하고 그 책임을 받아들임으로써, ‘주체’로서 자신을 세움으로써 타자와의 대화자의 지위에 한 걸음을 나아간 것이다. 그렇게 해서 구축된 주체만이 ‘집과 고향을 버릴’ 수 있다.
어떤 강령을 신봉하거나 어떤 신앙 조례를 실천하는 것을 통해서 하룻밤에 ‘회심回心’이 되어 모든 것이 아름다운 정서整序 안에서 현현하는 것 같은 맘 편한 사태는 월경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힘을 필요로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매일매일 신체를 움직여서 땀을 흘리고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는 일을 자신의 책무를 다하듯이, 성실하게 자신의 말을 단련하는 것이다.
4.
우리의 노력도 태만도 참가도 무관심도 전부 포함해서 그것의 합계로서 지금의 정치체제가 존재하고 있는 이상 한 발짝 물러서서 혹은 객관적으로 일본의 정치시스템이 이렇다 저렇다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대체로 일본의 정치 시스템은” 같은 말을 외국인과 같은 입장에서 말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 아니 허용되고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다.
그들이 일본의 상황이라는 함수식에 계산으로 넣는 것은 ‘자신의 무구함(혹은 무력함)’이라는 데이터이다. 청정무구하고 무력한 자로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것은 ‘자신이 포함되어 있는 여러 제도들’을 심문하는 데 있어서 아주 유리한 전략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현상이 아무리 나빠도 자신들에게 책임이 있을 리가 없다(이것은 미야자키가 비판하고 있는 페미니즘의 자기정당화와 똑같은 논리다). 이것은 안 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는 자신이 ‘무력’하다는 사실을 ‘자신이 약하고 어리석다’는 것의 결과로 생각하려고 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 ‘무력’을 우리보다 훨씬 강력한 것에 의한 ‘외부로부터의 금지’의 결과라고 해석하려고 한다.
이 ‘합법적인 자기 인식을 외부로부터 금지하는 존재’를 가리켜 정신분석은 ‘아버지’라고 부른다. 자신이 무력하다는 사실로부터 곧바로 ‘외부에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논리를 가진 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강력한 상위자가 있다’는 결론을 끌어낼 수는 없다.
이러한 어법에 의존하는 한 그것이 어떠한 이데올로기적인 색채를 띠고 있다고 하더라도(마르크스주의이든, 페미니즘이든 자유주의사관이든) 그것은 ‘부권제 이데올로기’라고 나는 간주한다.
5.
우리는 이 장면에 전형적으로 등장한 폭력 행사에서 평등성의 확보의 원칙을 ‘이방인의 모럴’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평등성만 확보되어 있으면 폭력은 면책된다는 것이고 한 걸음 더 들어가서 이야기 하자면 스스로 죽음의 위험을 감수할 용의가 있는 자에게는 ‘인간을 죽일 권리가 있다’는 말이다.
‘재판관의 존대함’을 갖고 말할 수 없다고 카뮈는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다. “자신이 모든 고발로부터 벗어나 있다고 믿기에는 너무나도 시대 전체에 얽혀 있는 자신의 공범관계를 숙지하고 있는 것의 불안”(Reponse a E.D’Astier, p. 361)을 갖고 카뮈는 말한다. 그러한 카뮈의 애매한 입장은 어떤 의미에서는 윤리적으로도 지적으로도 아주 성실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시대는 그러한 ‘이도 저도 아닌 애매함’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들에 대한 카뮈의 반론은 다음과 같이(맥 빠질 정도로) 상식적인 것이었다. 보편적인 행동의 준칙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무엇을 해도 좋다는 말은 아니다. 폭력은 불가피하다. 그렇다고 해서 폭력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교의상의 정합성과 혼의 안식을 추구하는 자는 이러한 이것도 저것도 아니게 보이는 인식에 머무를 수 없다. ‘평범한 사람들’은 비폭력을 외치든지 혹은 ‘어떤 종류의 폭력은 정당화될 수 있다’고 주장하든지 어느 한쪽 ‘수미일관된 사상’을 선택하고 거기에 안주하려고 한다. 그런데 카뮈는 ‘수미일관된 사상’, 어떠한 상황에도 적용 가능한 마스터키와 같은 단순한 논리에 기대는 것을 거절한다.
반복해서 말하지만 이것은 비폭력의 모럴이 아니다. ‘그래서 죽여서는 안 된다’는 포괄적인 결론을 이끌기 위해서 카뮈는 그렇게 논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폭력은 때로는 불가피하다. 죽이지 않으면 죽임을 당하는 제로섬 게임 같은 극한 상황은 있을 수 있고 실제로 카뮈는 그러한 시대를 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이는 자’와 ‘죽임을 당하는 자’가 최종적 국면에서 얼굴과 얼굴을 마주했을 때 거기에는 ‘죽이지 마’라는 호소가 있고 죽이는 것에 대한 억제하기 힘든 ‘망설임’이 발생한다. 그것이 폭력을 ‘한계 짓는’ 것이다. 현대에서 혹여 폭력을 효과적으로 제어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신앙의 완성도 아니고 계급사회의 폐절도 아닌 이 ‘망설임’을 사상의 준위로 끌어 올리는 ‘지성의 노력’이 아닐까 카뮈는 아마도 그렇게 물었던 것이다.
반항이라는 것은 한편으로는 (스파르타쿠스와 칼랴예프가 그랬던 것처럼) 결연히 사람을 죽이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과 동시에 살인을 정당화하는 것의 불가능성에 묶이는 것이다. 죽이고 싶지만 죽일 수 없다, 혹은 죽이고 싶지 않지만 죽일 수 있다. 이 배반을 사는 것이 반항적 인간이다.
6.
‘페스트’는 자신의 외부에 실재하는 사악한 어떤 것이 아니다. 그러한 실체화된 사악하고 강력한 존재를 자신의 ‘외부’에 만들어내서 그 강권적인 간섭에 의해서 자신들의 불행과 부자유의 이유를 설명하려고 하는 정신의 양상이야말로 ‘페스트’인 것이다. ‘나’의 ‘외부’에 있는 어떤 것에 모든 악을 응축시켜서 그것과 싸우는 주체로서 ‘나’를 구축하는 화법에 붙들리는 것이 ‘페스트’의 병증이다.
"모두 자신 안에 페스트를 키우고 있다. 누구 한 명, 이 세계의 누구 한 명 페스트에 감염되지 않은 자는 없다. 그래서 조그마한 방심으로 무심코 타인의 얼굴 앞에 숨을 토하거나 병을 옮기지 않도록 끊임없이 자신을 감시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자연스러운 것, 그것은 병원균이다."
‘페스트’는 ‘나’가 ‘나’로서 존재하는 것을 자명한 것으로 하는 인간의 본성적인 에고이즘의 다른 이름이다. 자신이 존재하는 것의 정당성을 한순간이라도 의심하지 않는 인간, ‘자신의 외부에 있는 악과 싸우는’ 화법에 의해서밖에 정의를 생각할 수 없는 인간, 그것이 ‘페스트 환자’이다.
인간은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사는 것만으로는 페스트에 가담하는 것에서 도망칠 수가 없다. 상대방과 ‘같은 조건’에 머무르는 한 페스트 환자라는 사실로부터 도망칠 수 없다. 인간이 ‘보다 인간적이’ 되기 위해서는 스스로에게 행하는 윤리적 부하를 ‘타자보다 높게’ 설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스스로의 내부에서 ‘선택’을 감지하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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