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말 오랜만에 일본인의 글을 읽고 마음에 든다는 느낌을 받았다.
1.
결혼이란 자신과는 어떤 공통점도 없는(결혼만 하지 않았다면 아마 일평생 모르는 사이로 끝났을) ‘불쾌한 이웃들’을 ‘가족’으로 받아들이고, 그 사람들의 취향이나 이해利害를 배려하며 살아가야 함을 뜻한다. 따라서 연애와 결혼은 플레이어에게 요구되는 인간적 자질이 완전히 다르다. 연애에 필요한 것은 ‘쾌락을 즐기고 쾌락을 증진시키는 능력’인 반면 결혼에 필요한 것은 ‘불쾌함을 견디고 불쾌함을 감소시키는 능력’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육아로 얻는 ‘쾌락’은 이런 ‘불쾌함’과 맞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육아가 ‘인생에서 가장 큰 성취’라고 힘주어 말한다. 그렇게라도 말하지 않으면 육아 따윈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남자 홀로 육아를 해온 경험으로부터 단호히 말씀드리건대 자식은 ‘불쾌한 이웃 넘버원’이다. 그 점을 받아들이고 끝까지 사랑할 능력이 없으면 육아는 결코 완수되지 않는다. 아이는 미피 캐릭터처럼 동글동글 보들보들한, 오로지 귀여운 존재라 생각하는 여러분은 망상을 키우고 있을 뿐이다. 이제 아셨는가. 인류가 재생산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자질은 ‘쾌락을 즐기는 능력’이 아니라 ‘불쾌함을 견디고 불쾌함을 쾌락으로 해석하는 자기기만 능력’이다. 그 능력이 있는 개체만이 자신의 DNA를 다음 세대에 남길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선택압selective pressure*을 견디고 살아남은 인간을 ‘승자’로 여기도록 인류학적으로 프로그래밍되어 있다. 이 ‘승패’의 판단은 우리의 자기 결정으로 뒤바꿀 수 있는 게 아니다.
결혼은 불쾌함을 극복해낸 인간에게 ‘쾌락’이 아니라 어떤 ‘성취’를 약속한다. 그 성취는 재생산이 아니라 ‘불쾌한 이웃’, 다시 말해 ‘타자’와 공생하는 능력이다. 그리고 아마 그것이야말로 근원적인 의미에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조건일 것이다.
결혼은 ‘쾌락’의 많고 적음으로 셈하면 틀림없는 ‘손해’다. 이 부분은 인정하겠다. 그러나 결혼을 ‘이득인가 손해인가’라는 말term로 생각하는 것은 ‘쾌락’의 화폐로밖에 만사의 경중을 잴 수 없게 된 ‘근대의 병증’이라는 점은 슬슬 깨달아도 좋으리라 생각한다. 인간을 진실로 ‘인간적’이게 만드는 것은 쾌락이 아니라 ‘수난’이다.
내가 제시한 잠정적 결론은 ‘결혼은 <득실>로는 잴 수 없다’였다. ‘손해인가 이득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어째서 당신은 <득실>이라는 판단 기준이 모든 인간사에 적용된다고 믿는 것인가?’라는 대답을 한 것이다.
여러분의 착각은 결혼이 ‘행복’을 가져다준다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이다. 이 점은 지난 회에서 말씀드렸다. 결혼을 추천하는 이유는 그것이 ‘불행’한 경험, ‘수난’의 나날을 약속해주기 때문이다.
인간만 하고 다른 영장류는 하지 않는 행동은 하나밖에 없다. 바로 ‘무덤을 만드는 것’이다.
인간의 인류학적 정의는 ‘죽은 자의 목소리가 들리는 동물’이다. 그리고 인간성에 관련된 모든 것은 이 본성에서 파생된다.
죽은 자와도 커뮤니케이션할 수 있다는 것이 인간의 정의다. 하물며 당신의 배우자는 살아 있다. 대화를 나눌 수 있고, 손으로 만질 수 있고, 따스하게 만들어줄 수 있고, 위로할 수 있고, 껴안을 수 있다. 결혼이란 ‘이 사람이 뭘 생각하는지 나는 모르고, 이 사람도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이 사람에게 말을 하고, 이 사람의 말을 듣고, 이 사람과 서로 신체를 만질 수 있다’라는 역설적 상황을 살아내는 일이다. 자신을 이해해주는 사람이나 공감할 수 있는 사람과 즐겁게 사는 것을 추구한다면 결혼을 할 필요는 없다. 결혼은 그런 것을 위한 제도가 아니라, 이해도 공감도 안 되지만 여전히 인간은 타자와 공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주기 위한 제도다. 혼인은 장례가 그러하듯 인류와 비슷하게 오래된 제도다. 사회 집단은 무수히 존재하지만 혼인 제도가 없는 집단은 존재하지 않는다.
당신은 그래도 여전히 “나를 이해해주는 사람들에게만 둘러싸여 지내고 싶다”고 말할 작정인가. 그것은 사실 “나는 인간을 관두고 싶어” “나는 원숭이가 되고 싶어”라는 말과 같다는 사실을 아직 알아차리지 못했는가. 하지만 잘 생각해보기 바란다. “나는 원숭이가 되고 싶어”라는 당신의 메시지를 들어줄 존재는 ‘인간’밖에 없다.
2.이혼에 관한 사회적 발언 대부분은 “싫어지면 참을 필요 없어요. 얼른얼른 이혼합시다”라는 식의 ‘생글생글 이혼 상담’ 같은 것뿐이다. 인터넷 세상에도 ‘이혼이라면 맡겨주세요’ ‘이혼 고민 친절 상담’ ‘잘 헤어지기 위한 법률 지식’ 같은 사이트가 빼곡하다. 나는 이런 이혼의 ‘간편화’ 경향에 회의적이다. 아무래도 미디어의 대세는 젊은 분들에게 ‘이혼’을 ‘대단치 않은 사건’으로 축소하여 보여주려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이혼 따윈 별것 아니에요. 결혼한 뒤 ‘아, 실수했다’는 생각이 들면 빨리빨리 이혼해서 또 다음 상대를 찾으면 되니까요.” 하지만 정말 그걸로 괜찮은 것일까? 이 ‘실패한 관계의 신속한 해소’에 따른 ‘보다 나은 파트너 발견’이라는 연애=결혼 전략은 어딘가에 본질적인 ‘거짓말’을 품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견딜 수 없다.
거듭 말씀드리겠다. 이혼하기 싫은데도 이혼하는 사람은 없다. 모든 이혼은 당사자 중 한쪽 혹은 쌍방의 근면한 노력으로 ‘이혼에 이르는 길’에 도달한 ‘골’이다. 한데 왜 이런 무참한 결말을 향해 우리는 발걸음을 재촉해야 했는가. 그에 대해 설명하기에는 이미 지면이 부족하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다음 회에!
이혼하는 사람은 결혼 생활의 사소한 사건 하나하나 속에서 거의 조직적으로 ‘결혼 생활 유지가 곤란해질 듯한 옵션’을 선택한다(장시간의 노동으로 피폐해진다, 가정 밖의 복잡한 인간관계에 휩쓸린다, 친구에게 돌려받을 길 없는 돈을 빌려준다, 승산 없는 승부에 자진해서 나선다…… 등등). 그리고 그 옵션으로 일어난 부부간의 다툼에서는 “이 정도의 ‘시련’도 못 견딘다면 우리의 결혼 생활이나 애정은 ‘진짜’라고 할 수 없어”라는 변명을 스스로를 위해 준비해둔다.
목적지에 이르는 절차를 반복해서 그려보고, 그 길을 당연하다는 듯 걸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명확하게 상상할 수 있는 사람은 상당히 높은 확률로 그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다. ‘꿈을 실현한다’는 것은 그런 일이다.
이혼은 ‘하늘에서 내려온’ 불행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면에서는 우리가 긴 시간을 들여 만들어낸 ‘작품’이다. 우리의 이혼은 우리가 ‘이혼에 이르는 길’을 구체적으로 상상하고, 게다가 그 상상으로부터 일종의 피학적인 ‘쾌감’을 얻은 결과다.
정년퇴직 후 갑자기 아내가 이혼 이야기를 꺼내서 남편이 기절초풍한다…… 이런 중노년 이혼이 최근 몹시 많다. 이런 종류의 이혼은 별다른 다툼 없이 협의가 척척 이루어진다. 이유는 간단하다. 이런 사례에서는 아내가 ‘불평 하나 없이 정숙하게 자신을 섬겨온 내가 갑자기 이혼 이야기를 꺼내면 저 바보 남편은 어떤 표정을 지으며 뒤로 나자빠질까……’라는 망상을 몇 십 년에 걸쳐 키우며, ‘이혼 시나리오’의 세부까지 묘사한 집필로 날마다 어느 정도 희열을 얻었기 때문이다. 세부까지 상상할 수 있는 미래는 그렇지 않은 미래보다 실현될 가능성이 명백히 더 높다.
3.‘경敬’이라는 한자의 원래 뜻은 ‘몸을 비틀다’라는 뜻이다. 사람이 어떤 경우에 몸을 비트는지 상상해보기 바란다. 다리가 땅에 달라붙어 있을 때 무언가 ‘위험한 것’이 다가오면 사람은 몸을 비튼다. 데드 볼을 아슬아슬하게 피하는 타자의 모습을 떠올려보면 알 수 있다. ‘공경한다’란 본질적으로 그런 뜻이다.
‘경어’란 ‘자신에게 재앙을 입힐 수도 있는 존재’, 즉 권력을 가진 존재(그 극단적인 예가 귀신이나 황제다)와 반드시 관계해야만 하는 국면에서 ‘몸을 비틀어’ 상대의 직접적인 공격이 지나가게 만들기 위한 생존 전략이다. 젊은 사람에게 ‘살아간다’는 것은 요컨대 ‘나보다 힘 있는 인간(그는 반드시 ‘나보다 현명한 인간’이나 ‘나보다 선량한 인간’이 아니다. 대부분의 경우 그렇지 않다)’에게 ‘휘둘리는’ 경험이다. 명령받고 계도받고 교육받고 조정당하고 처벌받는다.
이를 위해서는 자기보다 힘 있는 상대와는 결코 직접 대면하지 않을 필요가 있다. 해서는 안 될 것은 그런 상대와 ‘맨몸’으로 대면하는 일이다. 자신의 ‘속마음’이나 ‘참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자신을 지키는 데에 가장 나쁜 선택이다. ‘경어를 써서 이야기한다’는 것은 신사나 불당, 묘석 앞을 지나갈 때 ‘일단 합장’하거나 뜨거운 냄비의 뚜껑을 집을 때 ‘일단 장갑을 끼는’ 것과 본질적으로 같은 행동이다. 위험한 것에 직접 닿아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경우에 따라 우리는 ‘내 생각을 나의 언어로 이야기하는 것’ 혹은 ‘내가 진정 어떤 사람인지 알리는 것’을 피해야 한다. 그런 말은 보다 친밀한 상대를 위해 아껴두면 된다.
경어도 이와 같은 ‘도구’다. 그것은 ‘생존을 위한 도구’다. 그러니 ‘성가신’ 것은 당연하다. 보호용구니까 당연히 거추장스럽다.
4.고민 자체는 나쁜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때 ‘나는 과거에 한 번 부적절한 결단을 했다’는 자기 역사의 오점을 직시하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대는 일찍이 한 번, 스스로의 의사로 잘못된 결단을 자진해서 내린 사람이다. 그 사실에서 눈을 돌리면 그대에게 미래는 없다. 그대가 앞으로의 인생에서 두 번 다시 치명적인 실패를 저지르지 않기를 진정 바란다면, 이런 결단으로 내몰리는 국면에 이른 자기 자신의 ‘첫 번째 부적절한 결단’을 반성해야 한다. ‘나는 언제, 어떤 식으로 결단을 잘못 내렸나’, 이것을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이직은 ‘이혼남’이 재혼을 앞두고 결단을 망설이며 고민하는 것과 비슷하다. 이미 한 번 결혼에 실패했다는 것은 이 남자가 ‘여자를 보는 눈이 없거나’ 혹은 ‘여자와 공동생활을 못하거나’ 아니면 둘 다라는 뜻이다. 만약 이 ‘이혼남’이 이번에야말로 잘 해보기를 바란다면, 자신이 처음에는 왜 실패했는지 그 문제점 발견과 개선에 진지하게 몰두해야 한다는 점은 어느 분이든 이해하시리라.
“그게, 지독한 직장이란 말이에요. 이렇게 심할 줄은 몰랐어요”라는 넋두리에 나는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미안하지만. ‘이렇게 심할 줄 몰랐던’ 직장을 스스로의 의사로 고른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그대 자신이다. 그렇다면 그대가 스스로의 의사에 따라 ‘다음 이직처’로 지금 선택하려 하는 직장 역시, ‘언젠가 이직하고 싶어질 직장’일 가능성이 그렇지 않을 경우보다 높다. 이 점은 그대도 알겠지. 자신이 판단을 잘못 내려놓고 그 책임을 직장으로 돌리는 자기중심적이고 남 탓하는 삶을 사는 사람은, 당연히 이후 이직에 성공한 경우에도 새로운 직장에서 상사의 신뢰나 동료의 경의를 얻을 가능성이 낮다. 그러므로 결국 이런 타입의 사람은 어떤 이직처를 선택하든 실패하는 것이 숙명이다.
이 경우 필요한 것은 ‘어째서 나는 언젠가 이직하고 싶어질 직장을 선택하고 말았나’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는 일이다. 그런 질문을 하는 사람만이 다음 선택에서 실패할 가능성을 최소화할 수 있다.
5.지성이라는 것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남이 지적하기 전에 먼저 알아차리는 능력이지 자신의 올바름을 언제 어디서나 주장하는 능력이 아니다. 학자가 학자로 있을 수 있는 기간은 자신의 이론을 부정하는 데이터를 다른 연구자보다 빨리 발견하려고 노력할 때까지다. 경영자가 경영자로 있을 수 있는 기간은 자사 비즈니스 모델의 한계를 시장 반응보다 먼저 알아차릴 때까지다. 아무리 증거를 내밀어도 자기 의견을 굽히지 않고 아무리 충언해도 자신에게 곤란한 데이터를 무시하는 사람은 실패를 미루는 만큼 결국 피해를 키울 뿐이다. 그런데도 오늘날 일본에서는 총리대신과 관료를 비롯해서 선도 기업의 경영자까지 결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것을 생존 전략상의 ‘정답’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풍조가 젊은 사람들 사이에도 널리 퍼져 있는 것은 실로 슬퍼해야 할 일이다.
6.인구 재생산이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가장 큰 이유는 사실 연금이나 시장이나 노동력 제도 유지를 위해서가 아니다. 기술도 경력도 연금도 아내도 자식도 없이 고독한 죽음을 맞이한 프리터에게는 그 죽음을 애도할 ‘상주’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앞으로 몇 십 년 뒤 누구의 애도도 받지 못한 채 고독하게 죽어갈 독신자 수는 몇 백만에 이를 것이다. 이 ‘누구에게도 애도받지 못하는 죽은 자들’이 21세기 후반의 일본 사회에 얼마나 큰 ‘탈’을 일으킬는지.
아톰은 지구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친다. 따라서 나는 그것을 데즈카의 결론으로 봐도 좋다고 생각한다. 인간성을 담보하는 것은 DNA도 지성도 감정도 아니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 ‘나는 세상의 모든 인간보다 무거운 책임을 짊어지고 있다’는 ‘유책감의 (근거 없는) 과잉’이다. 데즈카는 우리에게 그렇게 가르쳐주려 했다. 그에 관해 말하자면 『우주소년 아톰』은 레비나스의 『전체성과 무한』과 거의 같은 결론을 이야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7.우리의 인생은 어떤 면에서는 일종의 ‘이야기’로 전개된다. ‘나’는 말하자면 ‘나라는 이야기’의 독자다. 독자가 책을 읽듯 나는 ‘나라는 이야기’를 읽는다. 모든 이야기가 그러하듯 이 이야기에서도 각 조각의 의미가 문맥 의존적이어서, 이야기에 마침표가 찍힐 때까지는 그 조각이 ‘정말로 의미하는 것’을 독자는 알지 못한다. 이는 ‘범인을 여간해서는 알 수 없는 추리소설’을 읽는 경험과 비슷하다. 수상한 인간이 몇 명이나 등장하는데 누가 범인인지 전혀 짐작이 안 가는 채 줄거리는 점점 더 얽혀서, 이런 기세로 과연 남은 페이지 안에서 제대로 범인이 밝혀지고 이해할 수 없는 밀실 트릭의 전모가 드러날지 독자는 불안해진다. 그러나 그 불안은 책을 읽는 즐거움을 조금도 손상하지 않는다. 아무리 용의자가 북적거리거나 밀실 트릭이 복잡괴기해도, ‘탐정이 마지막에는 범인을 훌륭하게 알아맞힌다는 것’에 대해서만은 독자가 온몸으로 확신을 가지고 이야기를 읽어나가기 때문이다. 결말을 아직 모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주 결말다운 결말’이 이야기의 마지막에서 우리를 기다리리라는 것에 대해서는 조금의 불안도 느끼지 않는다. 우리가 이야기를 즐길 수 있는 이유는 가상으로 상정된 ‘이야기를 다 읽은 자신’이 미래에서 현재 독서의 희열을 담보해주기 때문이다. 만약 마지막 장에서 탐정이 범인을 지명하며 모든 복선의 의미를 밝히지 않은 채 소설이 끝나버릴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우리는 추리소설을 즐길 수 없을 테고 애초에 그런 소설을 집어들지도 않을 것이다.
우리가 자신의 과거로서 떠올리는 이야기는, 요컨대 그 이야기를 다 들었을 때 듣는 이가 자신을 ‘어떤 인간이라고 생각하게 될지’를 목표로 행해진다. 이야기를 끝마친 미래의 시점에 듣는 이로부터 얻을 인간적인 신뢰나 존경, 애정을 목표로 나는 자신의 과거를 떠올린다. 이러한 인간 기억의 양상을 라캉은 ‘전미래형으로 이야기되는 기억’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이와 같은 일은 우리가 스스로의 현재를 이야기로서 ‘읽을’ 때도 일어난다. 우리는 지금 자신에게 일어나는 어떤 사건(인간관계든 연애 사건이든 일이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현시점에서 말할 수 없다. 그 사건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백 퍼센트 문맥 의존적이기 때문이다.
8.지금 시대가 힘든 이유는 젊은이들에게 ‘미래가 없기 때문’이다. 더 분명히 말하자면 젊은이들이 ‘죽은 뒤의 자신’을 현재 자기 자신의 의미를 알기 위한 상상 속 관측점으로서 그려보는 습관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확실히 젊은 사람 가운데는 자신의 생명을 거칠게 다루는 사람이 얼마든지 있다. 거의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무기력한 생활을 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죽은’ 게 아니다. ‘자신을 죽이고 있는’ 것이다. ‘자신을 죽이는’ 것과 ‘죽는’ 것은 다르다. ‘자신을 죽이는’ 인간은 ‘죽인 뒤’에도 상처 없이 ‘살아남을’ 생각이다. 자신의 신체가 사라진 뒤까지 자기 운명의 지배자로 머물러 있을 생각이다. ‘죽는다’는 것은 그런 인간의 전능성이 끝나고도 더 뒤의 이야기다. 내가 젊은 분들께 권장하는 것은 일단 하나뿐이다. 바로 자신이 어떤 식으로 늙고 어떤 식으로 병들고 쇠약해져 어떤 장소에서 어떤 죽음을 맞이할지에 대해 반복해서 상상하는 것. 곤란한 상상이긴 해도, 지금 이곳에 있는 그대들의 인생을 빛내는 것은 결국 그 상상력뿐이다.'그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말하기 힘든 것에 대해 말하기 (0) 2024.08.03 24년 7월의 잡담 (0) 2024.08.01 즐거운 학문 - 니체 (0) 2023.06.09 다른 바가바드 기타 17-18장 (0) 2022.10.31 다른 바가바드 기타 14-16장 (0) 2022.10.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