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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험기간이 되면, '너는 자신있지?' 혹은 '시험 잘 칠 자신있냐?' 같은 질문을 자주 받았다.
나는 늘 '자신 없어' 라고 말했다. 거짓말은 아니지만 보통의 그런 의미도 아니었다.
나는 대화를 잘 이해할 수 없었다.
의도나 감정은 어려웠고, 나에게는 번역이 필요했다.
국민학교부터 옥편, 국어사전, 영어사전을 날마다 수십번씩 들여다봤다.
물론 사전을 찾아본다고 이해되는건 아니었다.
나이가 들면서 느낀건..
인간이 그다지 의식적이지 않듯이, 인간이 그다지 언어적이지도 않다는 것이다.
의사소통에서 단어보다 중요한건 표정과 제스쳐, 말투와 성량 같은 것들이다.
친구한테 웃으면서 적당한 목소리로 '미친새끼' 하는거랑 화내면서 큰소리로 '미친새끼' 하는건 다르고
웃는다는게 중요한거지 '미친새끼'는 사실상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나는 그걸 아는데 너무 오래걸렸다.
2.
국민학교 저학년때 무릎 근처가 찢어져 10 바늘정도 꿰맸던게 생각난다.
사람은 배가 아프면 배를 잡고 소리 지르고 다리가 아프면 다리를 잡고 소리 지른다.
그래야 시선을 끌 수 있고 어디가 아픈지 누구나 알 수 있고, 도움받기가 쉬워진다.
그건 본능이다.
비오는 날, 놀다가 넘어져 무릎이 아팠고 보니까 찢어져 있었다.
가장 먼저든 생각은 '아프다' 이고
그 다음은 '다른 애들은 소리를 질렀던거 같은데 나도 소리를 질러야할까?' 였다.
소리를 질러보았다. 소리를 지르지 않아보았다. 똑같았다.
아픈 다리를 부여잡고 있어야 되는지도 생각했다.
무릎 위쪽을 꽉 붙잡아 보았다. 붙잡지 않아보았다. 똑같았다.
결국 나는 소리도 지르지 않고 부여잡지도 않았다.
아마 내가 소리를 지르고 다리를 부여잡고 있었던들
그다지 도와주고 싶게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내 목소리와 행동은 절박해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후 병원에서 꿰맬때 소리를 지르지도 않았고 울며불며 난리를 치지도 않았다.
아파서 그런지 눈물이 조금 났다.
씩씩하게 잘 참는다는 얘기를 들었다. 용감하다는 소리도 들었다.
하지만 나는 용감한게 아니었다. 물론 씩씩한 것도 아니었다.
3.
'자신있다' 가 사전에는 '어떤 일을 해낼 수 있다고 스스로 굳게 믿음' 이라고 나온다.
무슨 소린지 잘 모르겠다.
나는 밥을 먹을 수 있다고 스스로 굳게 믿는가? 나는 밥을 먹을 자신이 있는가?
굳게 믿지도 않고 자신도 없다.
하지만 나는 밥을 먹을 수 있다. 그리고 내가 밥을 먹을 수 있다는걸 안다.
밥먹는건 쉬운일이라 자신할 것도 없다면,
어려워서 안될지도 모르는 일은 어찌 자신할 수 있는가? ..모르겠다.
자신'있다'도 아니고 자신'없다'도 아니다. 둘다 아니다.
나에게는 '자신'이 없다.
어쨋든 나는 매사에 자신이 없었다.
시험을 잘 칠 자신도, 라면을 맛있게 끓일 자신도,
쟤보다 더 빨리 달릴 자신도, 이 사람보다 술을 더 많이 마실 자신도,
여자친구한테 잘 해줄 자신도, 주식해서 돈 벌 자신도, 좋은 의사가 될 자신도,
결혼하면 부인을 행복하게 해줄 자신도, 좋은 아빠가 될 자신도.. 아무것도 자신이 없었다.
물론 다른 사람들이 그런 말을 할 때의 감정과 의도를 이제 대강은 안다.
나이가 좀 든 뒤로는 '자신있냐, 없냐' 를 선택해야될 상황에 놓일 때 마다
'하면 하는거지' 라고 답한다. 당연히 그런 내 대답을 사람들이 썩 좋아하지는 않는다.
길게 설명했던게 부인밖에 없으니, 부인말고는 내 말을 알아들은 사람이 없을 것이다.
장인이 결혼 전에 '내 딸 행복하게 할 자신있지?' 라고 집요하게 물었던 기억이 난다.
나는 끝까지 그 단어를 피했다. '잘할게요' 정도만 반복했다.
결혼을 앞둔 이 세상 거의 모든 남자가 시원하게 장담하는 그 말을 한사코 거부하는 나를
장인은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4.
나는 시험공부를 누군가와 같이 한적이 없다.
애들끼리 모여서 뭐가 시험에 나오느니,
이게 정답이 이거니 저거니.. 하는 소란에도 말을 끼여본 적이 없다.
물론 나는 성적이 괜찮았고 고1,2 때만 해도 인기가 좀 있던 편이라
그룹스터디 권유나 문제 질문은 많이 받았다.
고1때 딱 한번 4명인 그룹스터디에 낀적이 있다.
원래 같이 놀던 애들이라 반쯤 억지로 잡혀들어갔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다른 아이들이 하는 말을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분명히 문제는 내가 풀었고 분명히 내가 맞았는데
다른 아이들이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하는걸 듣고 있으면
내가 그걸 아는게 맞는지, 맞춘건 맞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이해가 안됐다.
그게 내 마지막 그룹스터디였다.
그들이 나누고자 하는건 정보가 아니라 감정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시험을 위한 정보가 아니라 시험을 통한 동질감을 원하는것 같았다.
나는 그런걸 제공하기에 적합한 사람이 아니다.
지금도 가끔 게시판을 보면 똑같은 느낌을 받는다.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건 돈이 아니라 대화같다.
세이코타가 말한 트레이딩으로 돈벌기 위한 조건 1번이 떠오른다.
'돈을 벌고 싶을것'
5.
아들을 보고 있으면 자폐란 본능의 결여라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 얼굴이 붉어지고 음성이 커지고 소리를 내지르면 좋은 기분은 아니다..
그런 사람이 가까이 오면 나를 상처 입힐수도 있다..
누군가 나를 보고 웃으면 이 사람이 호의적이다..
..같은걸 우리 아들은 본능적으로 모르는것처럼 보인다.
경험으로 배워야 한다.
웃고나서 이 사람이 나한테 잘해주었다. 그러니 웃는것은 좋은것이다..
화를 내고나서 이 사람이 나를 때렸다. 그러니 화를 내면 피할 준비를 해야한다..
..같은걸 전부 배워야 한다.
지금은 1,2년전에 비하면 아들이 훨씬 낫다. 경험에서 배우고 있을터다.
아들을 걱정하고 나쁜 유전자를 물려준걸 미안해하는 것도 내가 어딘가에서 배운것일까?
딸을 사랑하는것과 마찬가지로 이건 내 본능인것 같다.